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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의 샘

성경이 만든 사람 < 07 >

  • 작성자: 남궁형
  • 작성일: 05-10-17 10:08
  • 조회: 1,211회

본문

"미소와 웃음은 시간이나 돈이 들지 않으면서도 사업을

번창시킨다." - 존 워너메이커

07

위기를 기회로 만든 비지니스맨

오크 홀 의류점 창업

YMCA 활동과 주일학교 교사로 바빴던 워너메이커였지만

틈틈이 사업에 관한 구상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어릴적 자신이 장래 희망으로 택한 "사업가" 의 꿈을

놓칠 리가 없었던 것이다.

상점에서 점원일을 부지런히 했던 그는 나름 대로의 창업

아이템과 마인드를 철저하게 세우고 일을 추진해 나갔다.

드디어 1861년, 워너메이커는 나산 브라운(아내 메리의 오빠)

과 함께 각각 2천 달러씩 투자하여 "워너메이커와 브라운

오크 홀(OakHall)" 의류점을 창업했다.

사실 그 해는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기에 적당한 때가

아니었다.

링컨 대통령이 노예 해방을 외치면서 나라가 남쪽과 북쪽

주로 갈려 전운이 감도는 긴장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창업하는 일은 그 만큼 위험부담을 안고

있었다.

그렇지만 워너메이커는 오랫동안 준비했던 창업을 더 이상

늦추거나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계획대로 밀고 나가기로 결심하고, 필라델피아 하이

스트르트에 남성복(소년들 포함) 전문 의류점을 개업하였다.

그리고 4일 후 우려했던 대로 남북전쟁이 발발했다.

누가 보아도 워너메이커의 사업의 출발은 어둡게만 보였다.

그러나 그런 위기에 진정한 인물은 두각을 나타내는 법이다.

워너메이커와 나산 브라운은 주저앉지 않고 어려서부터 몸에


밴 개척정신과 근면, 절약 정신을 발휘했다.

또한 새로운 사업 아이디어를 동원해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나갔다.

그 둘은 손발이 척척 맞는 아주 이상적인 동업자였다.

워너메이커는 앞에서 비전을 제시하며 이끌고 나가는 리더형

이었고, 나산 브라운은 뒤에서 꼼꼼히 잘 챙겨 주고 받쳐주는

참모형이었다.

나산은 워너메이커에 대한 강한 신뢰감이 있었고,항상 그로

하여금 앞장서서 일하도록 도와주었다. 그들은 사업 초기부터

이윤이 얼마가 되든지 최소 생활비만을 제외한 나머지를 사업

확장에 재투자하기로 서로 동의하였다.

오크 홀 상점은 6층 건물의 1층에 위치해 있었다. 크기는

약 68평 정도의 매장으로 모든 연령층의 남성복만을 판매하는

전문 의류점이었다.

뉴욕의 대사업가 A.T.스튜어트는 그들에게 30일 동안 외상

으로 물건을 공급해 주었고, 다른 의류업체들로부터도

기성복들을 구입해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가 비지니스 초기에 썼던 일기를 보면 오크 홀 의류점에서

공급받는 품목을 꼼꼼히 기록해 놓은 것을 알 수 있다.

ㆍ6벌의 비지니스코트 → 2.55(원가) : 3.50(판매가)

ㆍ6벌의 봄 오버 코트 → 6.82 :8.00

ㆍ12개의 검정색 털 양모 → 1.46 : 2.00

ㆍ6개의 검정색 남미산 털 양모 → 2.91 :4.0

ㆍ12개의 두터운 무명 옷 → 1.28 :1.75

ㆍ6개의 어른 바지 → 4.37 :6.00

ㆍ24개의 어린이 바지 → 2.55 : 3.50

첫 날에는 손님이 많지 않아 매상이 24달러 67센트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다음 날부터는 꾸준히 고객이 늘어나서 사업의

전망을 비교적 밝게 해주었다. 첫 주간 장사한 현금 출납부

기록을 보니 상점 설비에 드는 비용으로 365달러, 영수증

종이로 1달러, 옷감 견본으로 1달러 50센트, 비누 값으로

25센트, 광고비로 24달러 86센트, 저녁 식사로 50센트,

재단사 R 하그턴 주급으로 24달러 4센트가 지출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결국 첫 주 영업은 수입보다 지출이 많아 적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실망치 않았다.

그리고 그 다음 주에는 군복과 경비원 유니폼을 계약하는

행운을 안게 되었다.

군복을 조달하는 일을 위해 또 다른 재단사들을 고용함으로써

오크 홀 의류점은 동시에 제조업과 소매업을 하는 상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고객은 왕이다

워너메이커는 오크 홀 의류점을 창업하면서 새로운 비지니스

를 꿈꾸었고 그에 관한 원칙도 세웠다.

그는 비지니스가 제대로 행해졌을 때 주인과 고객 양쪽 모두

에게 이익이 된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 당시로서는 새로운 개념인 "고객의 권리" 를 생각

해 냈다.

"비즈니스맨은 고객을 왕으로 여기고 봉사해야 한다." 를

대전제로 모든 비지니스 원칙을 수립한 것이다.

고객을 왕으로 섬기기 위해서는 고객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연구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리고 연구 끝에 발견한 4가지 중요한 원칙을 신문 지면을

통해 광고하였다.

이러한 원칙은 평생토록 변하지 않았다.


<비지니스의 4 가지 원칙>

1.정가 판매를 실시한다.

2.상품에 품질표시를 하여 소비자의 알 권리를 돕는다.

3.반드시 현금거래를 한다.

4.구입자가 원하면 언제라도 반품, 교환할 수 있다.


당시 의류업계에서는 상품에 가격을 표시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상업윤리, 특히 거래유통은 문란하기 짝이 없어 물건을 사고

파는 사람들이 서로를 믿지 못했다. 상점 주인은 애초부터

가격을 높이 부르고 고객은 그 가격을 에누라하기 위해

흥정하느라 자주 실랑이가 벌어졌다.

장사꾼들은 으레 고객을 속이려 하는 것으로 의심받았기

때문에 고객들은 무조건 물건 값을 깍지 않으면 자신이

손해를 입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인이 부른 값에 절반도 안되는 가격에서부터

흥정을 시작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결국 판매자와 구매자 모두에게 물건을 사고파는 일은

너무나 피곤하고 유쾌하지 못한 일이 되어 버렸다.

워너메이커는 이러헌 폐단을 눈여겨보다가 누구나 똑같은

가격에 서로 신뢰하고 물건을 구입할 수 있는 "정가판매제도

(정찰제)"를 도입하였다.

더욱 파격적인 것은 구매한 물건이 만족스럽지 않으면 돈을

"100% 환불"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다른 비지니스 맨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정책은 이윤추구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허황된 것이었다.

당시에는 물건을 한번 샀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지

물건을 교환해 준다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그러한 시대에 워너메이커의 상점에서 이런 새로운 제도를

시도하겠다고 나선 것은 하나의 비니지스 혁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많은 상점 주인들은 그의 광고를 보고 비현실적이고 허황된

과대 광고라고 조롱하고 비웃었다.

어떤 상점 주인도 그의 원칙과 행동을 순수하게 받아드리려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고객들은 그의 신문 광고를 보고 호기심이 일어

났다.

워너메이커의 광고가 사실인지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오크 홀 의류점을 하나둘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광고가 사실임이 확인되면서 그곳을 찾았던 고객은

다시 워너메이커의 상점을 찾았고, 그들의 사업은 빠른

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68평의 상점은 건물 2층으로까지 확장되는 데 이르렀다.

첫 날 24달러 67센트에 그친 수입이 그 해가 지나기 전에

2만 4천 달러($24,152.62)를 훌쩍 넘겼고, 10년이 지났을

때는 연 매출액 2백만 달러($2,085,528.55)가 넘는 큰

사업으로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어 냈다.

작은 상점이 43명의 세일즈맨, 70명의 재단사, 그리고 20명의

일반 점원들을 둔 큰 사업체로 도약한 것이다.


현대 비지니스의 개척자

워너메이커와 나산 브라운의 동업은 1868년 나산 브라운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면서 끝나게 되었다.

이제부터는 워너메이커 혼자 그 사업체를 이끌어 나가야

되는 상황이었다. 그는 두 사람이 처음 7년 동안 함께

이룬 성공을 잊지 않기 위해 동업자의 이름이 들어간

"워너메이커와 브라운 오크 홀" 이란 상호를 계속적으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존 워너메이커라는 자신의 이름만을 사용하게 된

것은 다음해인 1869년 체스넛 스트리트에 두 번째 상점을

오픈하면서부터였다.

이때부터 "워너메이커" 라는 그의 이름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고객을 왕으로 섬기고 더 많은 서비스와 친절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고객이 물건을 구입하든 하지 않든 상관없이 자유롭게 물건을

구경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당장 구입할 물건이 없더라도 상점에 들어오는 것이 부담되지

않도록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그런 손님들은 바로 미래에 자신의 고객이 될 수 있다고 생각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든 방문객들이 더욱 편암함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

상점 안에 만남의 장소를 만들어 휴식 공간도 제공하였다.

비지니스가 더 성장하자 소지품을 맡기는 보관소, 전화기까지

설치하여 내 집과 같은 안락함을 누랄 수 있게 하는 등

서비스를 지속적으로 확대하였다.

그는 직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자주 하였다.

"우리는 광고한 대로 최고의 친절과 서비스를 제공해야

합니다.

고객들에게 품질을 정확하게 말해 주고, 잘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발림으로 강매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그런 대우를 받고 그들이 가정으로 돌아가면

한마디씩 불평할 것이고, 그 손님들은 다시 이곳으로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사업 초기에는 직원들이 물건 파는 것을 도와주는 등

직원들과 함께 매장에서 일을 하다가 사업이 커지면서 매장

일을 판매원들에게 맡겼다.

그렇지만 그는 수시로 판매원들의 서비스와 친절을 확인하기

위해 매장 문 앞에서 서 있는 버릇이 생겼다.

고객이 출구쪽으로 오면 그는 고객에게 "쇼핑이 만족스러

웠는지",

"판매원이 고객에게 친절하게 대했는지", 그리고 "감사의

말을 하며 다시 오라고 권유했는지"를 묻곤 했다.

만약 고객이 "아니오" 라고 대답하면 그 판매원은

"고객을 왕으로 섬기는 교육" 을 다시 받고 매장 일을

해야만 했다.

이처럼 워너메이커는 상업 윤리가 세워지지 않아 부도덕하던

시대에 비지니스의 중요한 원칙을 제시하였고 본인 스스로도

성실과 인내로 이러한 원칙을 충실히 지킴으로써 새로운

비지니스 시대를 열었다.

모든 다른 분야의 개척자들처럼 그도 처음에는 끊임없는

구설수에 휘말렸으나 차츰 인정을 얻게 되고, 결국에는

비합리적인 풍토를 송두리째 바꾸는 역할을 감당하였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를 "현대 비지니스 개척자" 로 부를

수 있는 이유가 된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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