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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의 샘

성경이 만든 사람 ( 06 )

  • 작성자: 남궁형
  • 작성일: 05-10-12 07:14
  • 조회: 1,023회

본문

"성공의 방법은 반드시 알릴 필요가 없다. 능히 한가지의

꼭 해야 할 일을 찾아 이에 전력하기만 하면 된다."

- 존 워너메이커

06

YMCAD와 함께 걸은 65년

노동과 교회봉사

교회 섬김에 열심이었던 워너메이커. 교회에서 믿음을 키우고

항상 성경을 가까이했던 그는 청년 시절 YMCA(기독교 청년회)

의 정식회원으로 그 누구보다 활발한 활동을 했다.

처음 YMCA인연을 맺게 된 것은 타워 홀 의류점에서 점원으로

일하던 19살 때였다. 그는 점심시간마다 짬을 내서 제니스

홀에서 열리는 기도모임에 참석했는데, 그 기도 모임은

그에게 영적 활력과 위로와 안식을 제공해 주었다.

매일매일 모임에 빠지지 않고 나갔던 그는 혹시라도 가게

일에 소홀하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이른 아침 가장 먼저

출근했고, 다른 직원들이 다 퇴근 한 후에도 늦게까지 남아

가게 일을 마무리 했다.

엿새 동안은 타워 홀 의류점과 YMCA 일로, 주일은 제일독립

교회에서 교사로 헌신하는 일로 일주일 내내 바빴다.

노동과 교회 봉사, 두 가지 일은 그의 삶의 전부였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타워 홀 의류점에서 일하던 워너메이커는

그만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말았다. 그는 급히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담당 의사는 "폐결핵 초기 단계로 당장 일을

그만두고 요양을 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하다" 고 진단했다.

타워 홀의 베네트 사장은 그의 가정 형편을 잘 알고 있었기에

병원비가 들어 있는 봉투를 내밀며 유급 휴가를 제안했다.

그러나 존은 "고맙지만 수고한 이상의 대가를 받고 싶지

않습니다.

저축해 놓은 돈이 조금 있으니 그것으로 해결하겠습니다."

하며 베네트 사장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의사의 충고대로 워너메이커는 모든 일을 정리하고 모처럼

몸과 마음의 쉼을 선택했다. 시카고와 미네소타의 한적한

지역에 머물며 요양의 시간을 보낸 그는 쉬는 동안 그 지역의

산과 강, 계곡과 초원등 대자연 속에 지내면서 차츰 건강을

회복하였다.

또한 성경을 깊이 묵상하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인생의

무한한 가치에 대해 귀중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요양 기간에 YMCA 기도 모임에 써 보낸 편지는 그가 얼마나

신앙에 마음을 쏟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제 건강은 아주 많이 회복됐습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다면 곧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회복된 건강을 가

지고 주님의 일을 할 생각입니다. 주님의 겸손하고 충실

된 종이 되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기도가 절실히 필요합

니다.
- 존 워너메이커

다행이 워너메이커의 건강상태는 호전되었고, 얼마 뒤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그가 다시 돌아간 곳은 타워 홀 옷 가게가 아니었다.

필라델피아 YMCA 유급 총무로 진로를 바꾼 것이다.

주위 사람들이 모두 놀랄 정도였다.

더 놀라운 사실은 필라델피아 YMCA 대표인 조지 H. 스미스가

침체된 YMCA 조직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젊고 유능한 워너메이

커를 그 당시로서는 고액 연봉인 1천 달러에 영입한

것이었다.

워너메이커는 입사한지 첫 해가 가기전에 연봉 1천 달러의

가치가 있는 사람임을 입증하였다.

57명의 회원으로 시작한 YMCA 조직은 1년 만에 2천명 넘는

회원으로 급성장하였고, 작은 그룹으로 시작한 기도 모임도

필라델피아에서 가장 큰 강당을 빌리지 않고서는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단체로 발전하게 되었다.

워너메이커는 열정적이고 헌신된 리더로서 훈련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단체를 체계적으로 관리했으며, 강요하지 않으면서

도 다른 리더들과 함께 팀워크를 이루는 리더쉽을 보여

주었다.

그는 YMCA 목적대로 "청년들을 예수께로 인도하기 위해 성경

을 바탕으로 한 영적, 정신적 상태를 개선하는 일" 에 혼신의

열정을 쏟았다. 그는 무엇보다 성경을 보급하는 일과 도시

전체에 성경공부 모임을 개설하는 일에 앞장섰다.

이를 위해 그는 직접 교사들을 모집하고 그들을 훈련시키는

일에 힘썼다.

당시 필라델피아는 산업화도 도시화의 영향으로 무작정

시골을 떠나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모여드는 젊은층들로

인해 급팽장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한 심각한 부작용들이

사회적인 병패로 되두되던 시기였다. 도시의 부패하고 타락한

환경(술, 담배, 마약, 섹스)에 쉽게 유혹되어, 방황하는

젊은이들이 무수히 늘어났다.

많은 교회들이 이러한 문제점들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몰려드는 젊은이들을 이끌기에는 준비가 부족한 상태였고,

젊은이들도 기존 교회에서 행하는 종교 모임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원너메이커의 지도 아래 YMCA 리더들은 이들을 불러

모아서 신앙교육과 다양한 생활 훈련 프로그램으로 그들의

삶을 변화시켰다.

그 가운데 워너메이커는 "금주 금연 서약 운동" 을 전개해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이 운동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그는 링컨 대통령의 사진과 함께 링컨이 기록한 술과 담배의

해악을 알리는 문구(술과 담배는 사회를 병들게 하는 암으로

사회를 파괴하기 위해 벼르고 있다.-A. 링컨)가 인쇄된

전단지와 금주 금연 서약서를 직접 만들어 젊은이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금주 금연 운동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YMCA 대표가 되다

이렇게 활발히 활동한 그는 1861년, "오크 홀 의류점" 을

창업하면서 새로운 비지니스에 전념하기 위해 3년간 섬기던

유급 총무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렇지만 필라델피아

YMCA 대표 조지 H. 스튜어트의 사임으로 인해, 1869년 이후

그는 계속해서 YMCA 대표의 자리에 잇게 되었고,평생 동안

단체의 책임자와 후원자의 자리를 감당하면서 젊은이들을

이끄는 일에 헌신하게 되었다.

그는 그해 여름, 도시 곳곳에 3백여 개 이상의 종교 모임들을

만들었으며, 기존 교회 예배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주일날

아침과 수요일 저녁을 제외하고는 매일 YMCA 모임을 운영해

청년 부흥 운동을 주도하였다.

청년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자 YMCA 회관 건립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고 드디어 얼마 되자 않아 당시로서는 가장

웅장하고 멋진 회관을 필라델피아에 건립하게 되었다.

회관 건립 모금을 위해 유명한 부흥사이며, YMCA 회관 건물을

세우는 데 공헌한 D.L. 무디가 초청되었으며, 이때 워너

메이커는 회관 건립에 필요한 거액의 헌금을 봉헌하였다.

당시 필라델피아 지역에는 3만 2천 명의 흑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흑인 목회자들의 요청으로 그는 첫 번째 흑인

지도자문위원의 일을 맡게 되었으며, 흑인 목회자들과

협조하여 "YMCA 흑인 지도부" 도 창설하게 되었다.

물론 건물을 구입하는 데 드는 비용도 흑인들을 위해 선뜻

그는 1871년과 1875년 런던으로 건너가서 YMCA의 창설자 조지

윌리엄스를 만나 그와 교제하며 깊은 영향을 받았고,

1894년에는영국 런던에서 열린 YMCA 50주년 기념 행사에

영사로 초청되어 말씀을 전했으며, 그곳에서 빅토리아 여왕의

초대를 받는 영광도 누렸다.

그는 시간이 흐를수록 젊은이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역의 장으로 YMCA를 강하게 신뢰하였다.

그는 필라델피아에 구세준 건물을 지어주면서도 그 단체가

"복음의 진리에서 벗어나는 경우 소유권을 YMCA로 이양한다"

는 문서를 법적으로 명시한 것만 보아도 어떤 단체보다 YMCA

를 신뢰한 것을 알 수 있다.

1900년 12월 10일자 편지글은 이 사실을 잘 뒷받침해

주고 있다.

나는 지난 40년동안 YMCA의 참여와 주의 깊은 관찰을

통하여 감히 말할 수 있다.

나는 YMCA가 젊은이들에게 주었던 그 많은 해택과 활동들

을 줄 수 있는 단체가 또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동안 YMCA는 모든 면에서 철저하게 개방적이고 합리적이

었으며, 도시의 모든 젊은이들에게 건전한 생활의 중심

지 역할을 해왔다. 안내자의 역할을 하는 YMCA가 없

다면 이것보다 더 큰 손실은 없다고 나는 믿는다.

그는 YMCA 사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 운동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 이 일에 깊이 관여하였고, 가능한 많은

모임에 참석했으며, 시간과 물질로도 헌신하였다.

그는 미국의 필라델피아뿐만 아니라 서울, 동경, 북경,

모스크바 그리고 인도의 마드리스, 케커타 등 세계 각국에서

YMCA 빌딩을 건축하는 일에 자신의 사업을 통해 모은 거액의

돈을 아낌없이 기부하였다. 1922년 당시 YMCA 총재인

R.모토는 워너메이커가 임종 직전 러시아를 위해 YMCA

건물을 기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분해 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존 워너메이커가 방금 임종 직전에 또 하나의 YMCA

건물을 기증했습니다. 벌써 그가 세게 각국에 YMCA

건물을 지어 주는 데 봉헌한 기부금만 자그마치 20만

달러가 넘습니다."

워너메이커는 19살에 YMCA 회원이 된 이후에 평생을 YMCA와

함께했다.

그가 60년이 넘는 기간 동안 YMCA에 끼친 영향은 정말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그는 YMCA를 통해 자신을 주님께 헌신했고, 젊은이들에게

믿음과 꿈과 희망을 나누어 주었으며, YMCA 빌딩들을 전 세계

곳곳에 세웠다.

작은 모임에 불과했던 YMCA를 세게적인 명성을 가진 단체로

높이 끌어 올린 것이다.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딤전 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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