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만든 사람 < 12 >
- 작성자: 남궁형
- 작성일: 05-10-23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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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을 다하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겨라”
- 존 워너메이커
12.
세계 최대의 베다니 주일학교
베다니 주일학교의 경이적인 성장
워너메이커가 21살에 베다니 주일학교를 설립하여 시작한
사역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65년 동안 변함없이 지속되었다.
그의 주일학교와 비지니스에서의 성공은 그 누구도 흉내 내기
힘든 기록적인 것이었다.
더군다나 체신부 장관으로 공직의 자리를 감당하면서도 결코
주일학교의 교사의 일을 소홀이 하지 않았다.
워너메이커의 이러한 헌신과 노력은 필라델피아를 여행하러
오는 수 많은 방문객들의 관광 코스로 초대형 백화점 그랜드
디포와 베다니 교회가 선택될 정도로 세인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방문객들은 경이적인 성장을 보이고 있는 주일학교의 젊은
부장이며, 성공한 비지니스의 주인공인 워너메이커를 만나
보기 위해 주일날이면 베다니 교회를 찾았다.
사람, 교회, 비지니스 할 것 없이 모두 끊임없이 성장해야
한다고 믿었던 그는 이 사실을 자신의 비지니스와 주일학교
사역을 통해서 입증시켜 주었다.
1858년 27명의 작은 숫자로 시작한 주일학교는 1년만에
275명으로 성장하였고, 10년 후에는 1천 명을 육박했다.
1천 명을 넘긴 후 5년만인 1873년 2,248명으로 주일학교의
학생수가 2천 명대로 진입했으며, 그 후에도 꾸준히 성장을
지속하다가 워너메이커가 체신부 장관을 지내던 1892년이
되어서는 3천명(3,170명)을 넘어서게 되었다.
통계자료를 보면 특이한 사실을 하나 발견하게 되는데,
그가 체신부 장관 임기를 수행하기 전에는 2천 9백 명 선에서
약간 주춤하는 상태를 보였다가 체신부 장관을 지내는
동안 500명 이상이나 주일학교 학생들이 늘어난 것이다.
그가 비록 주중에는 국정수행으로 워싱턴에 머물러야 해서
예전처럼 주일학교 사역을 활발하게 하지는 못했지만,
체신부 장관이라는 유명세와 더불어 워싱턴에서 필라델피아까지
어린들을 가르치기 위해 주말마다 왕복한다는 소문이 교회 성장에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가 체신부 장관의 임기를 마친 후 베다니 주일학교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1897년에는 4,833명이 되었으며, 1898년에는 한 해 동안만
1,200명 정도가 증가하여 연말에는 6,027명이 출석하는
당시 세계 최대의 주일학교를 이루게 되었다.
워너메이커는 베다니 주일학교가 5천 명을 넘으면서부터
더이상 한 교회로는 어린이들을 수용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베다니 교회를 중심으로 형제교회 건립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베다니 교회와 같은 목적과 이념을 가지고
사방으로 형재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그는 새로운 형제교회가 세워질 때마다 그 지역에 살고 있는
부모와 자녀들에게는 그곳에서 신앙생활을 하도록 권유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형제교회를 포함한 전체 주일학교
어린이 숫자는 1만 명을 훨씬 넘어섰다.
장년들의 숫자도 항상 어린이의 숫자와 비례해서 성장했음은
물론이었다.
초심을 잃지 않은 사람
그렇다면, 어떻게 워너메이커가 이런 엄청난 일을 이룰 수
있었을까?
일에 대한 열정, 창조적인 아이디어, 탁월한 조직 운영,
큰 믿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 등으로도 워너메이커의
주일학교 사역의 성공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워너이커가 한결 같은 열심으로 죽는 순간까지
초심을 잃지 않고 최선을 다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다가도 사업이
성공하고 사회적으로 유명인사가 되면 세상 모임이 많아져
바쁘다는 핑계로 교회 사역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교회 출석까지도 등한시하게 된다.
그러나 워너메이커는 정반대였다. 오히려 그는 사업에 성공을
거두고 사회적으로 유명인사가 된 이점을 베다니 사역에 십분
활용하였다.
그는 할 수 있는 한 모든 교회 모임에 참석하려 했다.
20살 청년 시절 때나 백화점 회장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때나 80대 노인이 되어서도 베다니 교회의 어려운
가정을 심방하며 그들을 위로하고 도왔다.
그는 결석한 학생들, 아프거나 거동이 불편한 성도들, 상을
당해 낙심 중에 있는 유가족들을 심방할 때, 어김 없이 꽃을
사들고 찾아가 따뜻한 말로 위로하고 격려해 주었다.
그는 사람들을 심방 하는 일을 의무감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
진정 즐거움으로 여겼다.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
유명하고 바쁜 사람들이 한 개인을 군중으로 대하듯이 성도들을
전체로 대하는 태도를 그는 경계하였다.
모든 베다니 교인들이나 주일학교 어린이들은 항상 그에게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친근한 개인들이었다.
최고령 노인들로부터 어머니 등에 업혀 있는 갓난아기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그의 가까운 친구였다.
그는 단지 아이들의 이름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아니들의 부모와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름까지도 연결시켜
기억하고 있었다.
덕분에 그는 많은 인기(?)를 누렸다.
이름은 저절로 외어진 것이 아니라 그만큼 사랑과 관심을
쏟은 노력의 결과였다.
워너메이커가 60회 생일을 맞은 날, 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데 주변의 어린이들에게 한 사람
한 사람 다정히 이름을 부르며 침근감을 표시하자 옆 자리에
앉아 있던 친구가 감탄하며 말했다.
"자네는 아이들 이름을 기억하는 재주를 가졌네!
도대체 아이들의 이름을 어느 정도나 기억하나?"
워너메이커는 친구에게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우리 교회 4천 명의 어린이들 이름을 다 외우고 있네.
물론 그 아이들의 부모님의 이름과 그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도 알고 있지.
내가 아이들의 이름을 외우는 것은 특별히 암기력이
좋아서가 아니라 아이들에 대한 관심 때문일세!"
그는 외워야 할 어린이와 어른들의 이름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자 주소록을 만들어 가지고 다니기까지 했다.
그 안에 사람들의 인상착의와 용모의 특징까지 빼곡히
메모해 가면서 이름을 외우는 등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신실하게 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는 자신이
교인들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포기했을 때 베다니를 위해
사용한 모든 물질과 수고가 헛될 수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하드웨어(교회 조직과 건물) 가
아닌 소프트웨어 (한 사람. 어린이)를 소중히 여겼다.
내 삶의 전부, 베다니
그는 대충대충 일하는 것을 본능적으로 아주 싫어했다.
"최선만이 최대의 효과를 얻는다.
열심히 일하지 않는 사람은 본인을 속이는 것이고,
좋은 결과도 얻을 수 없다." 는 것이 그의 인생철학 이었다.
그는 평생 동안 토요일 저녁 시간을 주일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보냈고, 모든 선생님들에게도 이와 같이 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는 선생님들에게 주님의 사업이 세상의 사업보다
우선시되어야 하며, 교사의 직분을 가볍게 여기면 주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음을 늘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권면은 늘 힘이 있었다.
그는 세상을 떠나는 때가 임박했을 때 자신의 일기장에
이렇게 기록하였다.
베다니는 내 인생의 영광이었는가, 비극이었는가?...
베다니에서 보낸 세월을 회상해 보니 내 인생은 참으로
행복했다.
젊은 시절부터 베다니를 섬기면서 나는 인생의 좋은
습관들을 쌓았다.
왜 사람들은 65년의 베다니 사역을 인생의 다양한 즐거움을
포기하고 단조롭게 산 희생으로만 여길까?
난 그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다.
난 항상 베다니의 모든 것을 좋아 했고 그곳에서 내 인생을
즐겼다.
나는 베다니로부터 걱정이 아닌 만족을, 근심이 아닌 축복을
받아 누렸다.
베다니는 그의 말대로 자신의 삶의 전부였다.
세상 어느 누구도 워너메이커처럼 그 긴 세월 동안 한결 같은
열정으로 어린이들을 돌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어린이들을 사랑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어린이 한 사람 한 사람을 존경했다.
세계 최대의 주일학교를 만들기 이전에, 그는 6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자신의 자리를 지킨 최고의 교사였고, 어린들의
자상한 아버지였으며, 진정한 친구였다.
그리고 세계 최대의 베다니 주일학교는 어린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인생을 살다간 워너메이커에게 어린이들의 숫자로
보답해준 축복의 선물이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
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시고"(마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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