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만든 사람 < 08 >
- 작성자: 남궁형
- 작성일: 05-10-18 07:10
- 조회: 1,39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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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잃는 순간 그 지위도 지식도 그대 곁을
떠난다 ”
- 존 워너메이커
08
워너메이커만의 독특한 광고 기법
포스트 광고 애드벌룬
워너메이커가 사업을 시작했던 1800년대만 해도 아직
상점에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고 구멍가게 수준의 소매업이
주류를 이루던 열악한 시대였다.
더욱이 상점 주인들이 매출을 높이고 사업을 알리기 위해
신문이나 방송을 이용해 광고를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힘든
일이었다.
그렇지만 워너메이커는 사업 초기부터 광고의 중요성을 인식
하고 독특한 아이디어와 광고 기법을 통해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어느 날 필라델피아 주민들은 "W & B" 라고 쓰여진 15센티
미터짜리 정사각형 포스터가 도시 곳곳에 나 붙어 있는 것을
목격 했다.
다른 글자나 힌트는 전혀 없고, 그저 "W & B" 라고만 적혀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처음 보는 포스터라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포스터에 대한 궁금증은 입소문을 타고 마을 전체로 퍼져
나갔다.
결국 며칠이 지난 후, 마을 사람들은 두 번째 포스트를
보고서야 그것이 "워너메이커 & 브라운의 오크 홀 의류점"
오픈을 알리는 광고 포스터임을 알게 되었다. 상점의 창업을
알리고, 고객들로부터 관심을 끄는 광고 효과로는 대성공
이었다.
개점 첫날 24달러 67센트의 수입을 올린 워너메이커는
다음 날 잔돈으로 사용하기 위해 67센트는 금고에 넣어 두고
수익금 전액을 일간신문 인콰이어러(Inquirer)지 광고에
투자했다.
그의 광고 기법은 매우 독특하고 새로워 엄청난 광고 효과를
가져왔다.
한번은 6미터나 되는 대형 풍선을 직접 만들어 비지니스
홍보에 사용했다.
워너메이커와 경영진이 회사 옥상에서 "애드벌룬" 을 제작해
서 공중에 높이 띄워 놓은 것이다.
먼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애드벌룬을 보고 신기해하며
그것을 구경하기 위해 오크 홀 상점으로 모여들었다.
몇개의 애드벌룬은 광고 문구와 함께 옥상에서 날려 보냈다.
"풍선을 가져오는 분에게
신사복 한 벌을 공짜로 드려요."
마을 전체가 풍선을 쫓느라 야단법석이었다. 풍선하나는
뉴저지 주의 숲이 우거진 늪지대까지 날아갔는데 6개월
만에 농부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진흙 범벅이 된 풍선이 나중에는 늪지대 속에 숨어 살고 있는
거대한 괴물로 오인되어 경찰까지 출동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이 사건이 뉴스에 보도되면서 광고 효과는 최대치로 올랐고,
뒤이어 다른 업체들도 애드벌룬 이벤트를 따라하게 되었다.
워너메이커의 광고에 대한 발상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머리 속에서는 끊임없이 기발하고 참신한 홍보와
이벤트 아이디아가 떠오르고 있었다.
워너메이커는 오크 홀 의류점을 시작하면서 높이가 30미터나
되는 대형 입간판도 세웠고, 기차역과 도시의 중요한 장소
마다 대형 간판을 달았다.
이 간판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게 된 것은 당연했고,
새롭게 시작한 그의 사업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역할
을 했다.
이렇게 100년도 훨씬 전에 시작된 대형 간판 광고는 현재
미국의 전역의 상가 건물과 고속도로 주변, 심지어 건물
옥상에까지 모든 사업가들이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홍보
전략으로 정착되었다.
비지니스의 꽃, 광고
그는 정직한 광고를 통해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제품의
장점들을 알릴 수만 있다면 그것을 접한 사람들은 자신의
물건을 반드시 구입 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지난날의 낡은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창의적인 방법으로
모든 일들을 새롭게 바라보았으며, 항상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고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워너메이커의 아이디어는 무궁무진했다.
그 당시 작은 상점으로서는 감히 꿈도 꾸지 못했던 4페이지
짜리 월간지인 모든 사람의 저널을 발간한 것만 보아도
그렇다.
그는 이 월간지를 자신의 상점을 찾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계속 받아보기를 원하는 자들에게는 우편 발송도
해주었다, 월간지 안에는 단순한 상품 광고만이 아니라 좋은
칼럼과 감동적인 글, 삽화 등 다양한 내용이 실려 있어 고객
들에게 알찬 볼거리, 읽을거리를 제공했다.
당연히 사람들의 반응은 대만족이었다.
워너메이커에게 있어서 광고는 비지니스의 생명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광고 업계에서 유명하다고 인정받는 인재들을
고용하여 이 분야에 더 박차를 가했다. 그는 백화점 "그랜드
디포(Grand Depot)"를 개점하면서 농부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농업 저널도 발행했다.
농업 저널은 정보를 전혀 접하지 못하는 시골 농부들에게
대단한 호응을 얻었으며, 필라델피아 지역뿐만 아니라 미국
전역의 농부들이 농업 경제에 눈을 뜨도록 했다.
그리하여 13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사랑받는 잡지로 남아
있다.
그는 기업과 제품을 광고할 때 생생하면서도 그림 같은
언어를 사용했으며, 새로운 용어로 그의 생각을 표현하기를
즐겼다.
그 당시 그가 만들어낸 신조어들은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에도 계속 유행하고 있다. 예를 들면,
"소비자는 왕이다!"
"현금 판매, 정가 판매, 반품 환불 보장."
등의 말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전혀 생소하지 않은
대원칙으로 지켜지고 있다.
워너메이커의 기발한 아이디어는 광고 전단에서도 발휘했다.
그는 5달러짜리 지폐의 복사본을 전단지에 그려 넣어 낮은
가격에도 옷 한벌을 구입할 수 있다는 것을 홍보했다.
또한 당시 필라델피아 상류층에서는 사륜마차가 유행이었는
데, 워너메이커는 마차를 빌려 네 마리 대신 여섯 마리 말이
끄는 유람형 마차로 개조하고, 직원들에게 최신식 마부 옷을
입힌 뒤 마차를 타고 동네를 행진하도록 했다.
또한 요트 시즌이 돌아오면 직원들이 요트 복장을 입고
요트 모양의 깃발을 만들어 거리를 활보하게 했으며,
시민들은 그들의 익살 스러운 모습에 매혹되어 수백 명씩
그 뒤를 따랐다.
나팔 소리와 함께 행진이 진행되는 사이 직원들은 광고
전단을 나눠주며 판촉 활동을 벌였다.
신문을 통한 기업 이미지 광고
워너메이커의 사업이 급성장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광고 전략에 있어서나 판촉에 있어서나 매사에 적극적이고
신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의 비지니스 광고 역사의 시작 단계에
불과했다.
그의 신문광고는 이것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광고 문구는 신선하고 세련되어서 미술 전공 대학생들까지
그 광고를 스크랩할 정도였다.
그에게 있어서 신문은 소비자와 기업이 가장 신속하게
만나는 장이며, 가장 경재적이고 확실한 광고 효과를
낼 수 있는 매체였다.
그는 신문광고를 통해 기업이 이유보다 고객을 위해서
존재하고 "항상 소비자 편이고, 소비자가 왕" 이라는 이미지
를 지속적으로 심어주었다.
또한 제품 가격들은 공정하고, 물건들을 믿을 만하며,
고객이 만족하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반품할 수 있고,
돈도 100% 환불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성장을 거듭한 워너메이커의 사업은 초대형 의류점
"그랜드 디포"를 오픈하기에 이르렀다.
1876년 "미국 독립 100주년 기념 박람회"의 시작과 때를
맞추어 문을 연 그랜드 디포는 당시 매장 평수가 2천 4백
평에 이르는 초대형 매장이었으며, 진영된 상품만 해도 50만
달러가 넘었다.
그는 그랜드 디포 오픈을 홍보하기 위해 수백만 장의 전단을
만들었다.
그는 이때도 신문에 전면 광고를 실어 그랜드 디포의 오픈을
알렸다.
"신문 전면에 사업 광고가 나간 것은 신문 역사 이래 처음
있는 사건" 이었다.
그랜드 디포가 문을 여는 날 사람들은 구름 떼처럼 모여
들었다.
당일
약 7만 명(71,106명)이 넘는 고객들이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자 654명이나 되는 직원들은 고객들을 통제할 수 없어서
진땀을 흘렸다.
임원진도 발 디딜 틈 없이 몰려드는 고객들 때문에 안전사고
가 우려 되어 방문객 수를 제안하는 방안을 검토할 정도였다.
다음 날 신문에는 미주리 주에서 온 고객의 탄성이 광고에
게재되었다.
"그랜드 디포 매장은 대초원을 연상시킨다! 가장 큰
대초원을…. 그랜드 디포는 미국 독립 100주년
행사보다 더 크다."
그는 지속적으로 기업의 이미지를 홍보하기 위해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숫자인 10만 달러가 넘는 신문 광고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그러나 주일에는 어떤 광고도 하지 않는다는 특이한 조건이
었다.
그해 그는 수십만 달러가 넘는 광고비를 지출하고도 4천만
달러가 넘는 수익을 올렸다.
1865년, 필라델피아 지역의 주소록에는 모든 페이지 윗부분에
워너메이커 상점의 광고가 반복해서 실려 있었다.
이것은 독자가 어느 페이지를 보더라도 눈에 띌 수 있도록
의도한 것이었다.
1911년, 워너메이커는 세계에서가장 큰 백화점을 건축하고
이렇게 광고했다.
"필라델피아에 완공된 `워너메이커 백화점' 은 높이가
76m이고, 넓이가 85m이며, 길이가 164m이다.
3만 톤의 강철과 2만 4천톤의 화강암으로 지어졌고,
백화점 매장 공간만 4천 평이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큰 매장이다."
워너메이커는 비지니스가 성장하고 점포수가 확장됨에 따라
판매를 위한 직접 광고보다는 고객을 섬기고 봉사한다는
기업 이미지 광고에 역점을 두었다.
그는 실제로 큰 액수의 개인 비용을 투자하여 다양한 문화,
예술, 교육 행사를 활발하게 지원했다.
음악회, 연극 공연, 미술 전시회, 오르간 발표회, 글짓기
대회, 저자 사인회 등 다양한 이벤트를 자신의 백화점에서
열었으며, 군인들의 날, 펜실 베니아주의 날, 스콜틀랜드인의
날, 성 패트릭스(아일랜드 성자)의 날, 어린이 날, 어머니날,
저자들의 날을 기념하여 각종 행사를 개최해 고객들에게
선물과 음식을 제공하기도 했다.
이러한 행사는 자연히 사람들에게 기업의 좋은 이미지를
심어 주었으며, 백화점이 그 지역 주민들의 중심권에 자리
잡게 되었다.
워너메이커의 광고 철학은 광고 책임자에게 건넨 다음의
작은 메모 속에 잘 나타나 있다.
당신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고객을 왕으로 섬기고,
상품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여, 가장 쉽고 핵심적인
말로 홍보하는 것입니다.
물건을 많이 파는 것 이상으로 브랜드의 명성을
높이는 일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지혜 있는 자는 강하고 지식 있는 자는 힘을 더하나니 너는
모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모사가 많음에 있느니라"(잠 2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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