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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아내 벨라뎃다에게

  • 작성자: 정태호
  • 작성일: 10-09-25 00:44
  • 조회: 1,290회

본문







                   사랑하는 아내 벨라뎃다에게...


 






주님의 귀염둥이 벨라뎃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할 지 가슴이 막막하고, 눈물이


왜 이리 앞을 가리나 모르겠네.



못 난 나를 따라 병 든 어머니와 어린 동생 두고 집을 나서던


그 새벽길!


병 든 어머니는 딸을 내보내면서 장독단지 하나라도 더 챙겨


보내고 싶어 중풍으로 걸음걸이도 불편하신 몸을 이끌고


대문밖까지 나오셨지.



“어여 가라! 누가 볼라? 잘 살아야 한다 정숙아!”


주름살 깊이 패인 눈가에 눈물방울 맺힌 것 닦을 새도 없이


어여 가라 손짓하셨네.



점이 되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대문밖에서 손 흔드시던 어머니!


어린 동생까지 놔두고 차마 발 길 떨어지지 않는 그 길을 따라 남목의



단칸방에 우리 소중한 짐을 풀었지.



내가 아침 일찍 출근하고 나면 집안일 정리하고 때맞춰


저녁준비하느라 정신없이 하루 하루를 보냈을 당신!



그러다 잠자리에 들기만 하면 집에 두고온 병든 어머니와 어린


동생 생각에, 나 몰래 눈물흘리던 당신 달래다 나도 눈물이


솟구쳐 같이 부둥켜 안고 울던 때가 하루 이틀인가?




어쩌다 장생포 고향 친구들 만나면 “우리 엄마, 동생


어떻게 지내더노?”


그렇게 바람결에 듣고 또 눈물흘리던 내 사랑하는 아내 벨라뎃다!



물론 그 당시 우린 종교가 무엇인지 관심조차 두지 못하던


시절이었지.


 





 


단칸방에 불쑥 찾아온 동생


 



그러던 어느날 우리 단칸방에 불쑥 찾아온 어린 동생 영호!



“누나야! 내 형수밑에 도저히 못있겠다. 누나 집에 조금만


지내자.”



그렇게 해서 단칸방 다락방에 동생을 재워야 했지.



그렇잖아도 병든 어머니와 동생 생각에 매일 눈물흘리던


당신이 애처롭기만 했는데 동생이 찾아와 주어 위안을 줄 수


있어 참 좋았네.



남목의 그 단칸방 주인이 좀 모질었지?



동생까지 데리고 있다고 나가라 하지 않았나?



그래서 월봉 골짜기 비가 오면 장화신지 않고, 오를 수 없는


고지대 단칸방으로 이사를 했지.



거기서 살면서 주말이면 늘 율리 언니네 집에 놀러갔다 오기도


했는데, 어느날 알뜰살뜰 모아둔 살림살이 도둑이 홀랑 들고갔어.



카메라, 텔레비전, 이불, 보온밥통, 더욱이 친구에게 빌린


외출용(비로도) 옷까지 다 없어져 버렸지.


너무 큰 충격에 오들오들 떨면서 방에 들어서지 못하던 새댁이


벨라뎃다!



“언니야! 우리집에 도둑맞았다. 어쩌면 좋노?” 울면서


하소연하는 처제가 안쓰러워 당신 형부는 텔레비전이랑


보온밥통을 새 걸로 사주셨제?


 





 





월봉 골짜기 단칸방 하면 또 하나 떠오르는 거 없나?



내가 회사만 갔다오면 밥상머리에서 너랑 영호가 다투는 거


여러번 보고 참다못해 하루는 내가 밥상을 걷어 차 버렸제?



상추랑 깻잎 따와서 쌈 싸먹으려고 밥상위에 놓여진 멸치젖이


온 사방에 퍼져 벽지에 튀어 좁은 방안은 난장판이었네.



월봉 골짜기에서 살면서 우리는 가난하지만 훈훈한 인정이


넘치는 꼬방동네 사람들이었어.



셋방살이하면서 집 없는 서러움 많이도 당했제?



집 주인이 좋으면 세 사는 사람끼리 사이가 안좋고, 세 사는


사람끼리 좋으면 집 주인이 안 좋아서 자의던 타의던 이사도


많이 했네.



그래서 우린 맹세했제?



먼 훗날 우리도 집 주인되면 세 사는 사람 제 마음대로


살게 해 두자구.....


 




 


동생 영호도 군대가고


 



남목의 단칸방으로 불쑥 찾아온 동생 영호를 데리고 같이


지낸것도 몇 년이 흘러 영호도 마침내 군대를 가게 되었지.



하나뿐인 처남 영호!


월봉 단칸방 살 때 친구들이랑 싸움이 벌어져



밤 12시 넘어 담을 넘고 들어와 난리 굿을 치던 말썽꾸러기!



군대가고 제대할 때까지 면회 한 번 가지 못 한 게, 지금도


마음에 걸리네.



내 작은 아들 녀석 군대가던 날 논산훈련소까지 따라가고,


서울 성동구치소 배치받고 난 뒤 몇 번을 찾아갔는지 모를


지경이었었지.



처남 영호가 군대 간 시기는 나 역시 현대중공업 입사한 지


얼마되지 않았고 살아가기 빠듯하기만 할 때였어.



친구랑 싸우고 누나에게 대들기만 하는 철딱서니없는 동생이지만


 그래도 강인한 정신력으로 제대하고 직장도 다녔지.


 





 


동거생활 몇 년! 이제 결혼식 올려야지?


 



벨라뎃다! 우리가 남목에서 처음 동거생활 한 지도 어언


몇 년이 흘렀었지.



당신 생각나? 당신이 한 말 있었지.



“남의 집 놀러가 보면 결혼사진이 걸려 있는게, 그렇게 부러울 수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어.



그러던 차에 우리도 결혼식 할 기회가 오는 듯 했지?



부산에 계신 아버지가 울산의 삼촌들에게 “내가 숨이 차서


차를 타고 다니기 힘이 드니 태호 처가를 찾아가 결혼식


올리도록 해 보라.”



그리하여 큰 삼촌, 둘째 삼촌 내외분, 고모까지 우여곡절 끝에


장생포 당신 친정으로 몇 년만에 찾아간 지 모를 지경이었지.



사실 둘째 삼촌은 장생포 가는것을 완강히 거부를 했지.



“남자집에서 뭐가 아쉬워 여자 집을 찾아가 결혼식 시킵시다.


 사정을 한단 말이요?” 하며 안 가려 하는 걸 큰 삼촌이 설득했지.


 




 



때마침 장생포 집에는 장인어른 제삿날이라고, 제사상 차릴


준비로 어수선 해 있었고 당신은 올캐 찾아오느라 마음이 급했지.



마침내 올캐를 찾아와 서로 상견례를 하고, 우리 결혼식


문제로 이야기가 오가던 중이었지.



삼촌, 숙모들은 “이미 둘이서 살림을 하고 있으니, 혼수는


크게 벌일 것 없이 여기서 시부모 옷 한 벌씩과 신랑


옷 한 벌 해 주세요.”


그랬는데 당신 올캐는 “우리는 시동생들이 많아서 먹고 살기도


힘드니 신랑 옷 한 벌밖에 못 해 줍니다.


열 번 백 번 만나도 더 이상 해 줄 능력이 안됩니다.”


딱 잘라 말하는 바람에 발끈한 우리 삼촌, 숙모, 고모까지



다 나와 버렸지.



우리 불쌍한 벨라뎃다! 당신은 울고 불고....



                   이렇게 되어 몇 년동안 동거생활을 청산하고 결혼식을 올리려나?


                                   하던 기대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지.



                        삼촌, 숙모들, 고모의 눈총은 마침내 “너희들 동거생활


                         한 지도 몇 년인데 왜 아기가 안서나?” 까지 비화되어


                                               마음고생이 심했제?


 






 



첫 아들낳자 친정 어머니 돌아가시고....


 



결혼식의 들뜬 꿈은 사라지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살아가던 중,


당신은 첫 아들을 남목 임태균 산부인과에서 낳았지.



아들을 낳은 기쁨에 당신이 뭐 먹고 싶어 하는가 싶어 물어보니


단감이 먹고싶대서 시장에 달려가 단감을 사 먹었지.



그것도 잠시 난 회사 출근해야 했고, 산모를 돌봐줄 이 한 명 없는


 산부인과 병실에서 당신 혼자 덩그라니 외로이 있었어.



아기를 데리고 우리 보금자리 단칸방에 온 지 며칠 뒤, 청천벽력


같은 비보를 들어야 했네.




장생포 계신 어머니가 운명하셨다는 소식!




들리는 바에 따르면 오빠와 올캐가 회 장사를 하러 다니는데다,


중풍으로 똥, 오줌을 못가리니 밥을 제 때 못 줘 굶어


돌아가셨을거라는 소식이다.



얼굴이 퉁퉁 붓고 몸 조차 가누기 힘든 산모가 울고, 또 울고.....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봐야 하는 것은 차라리 고문이나


마찬가지였지.



“엄마! 불효여식 용서하이소. 당신 외손자도 못보고 그리


가시다니요?



병 든 엄마 두고 나와 내 가슴에 못이 배어 있는데...... ”



장생포에서 엄마를 화장하기 위해 방어진 화장터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당신은 영구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기위해


발돋움하며 보고 통곡을 했지.


 








 



사내 합동결혼식을 치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우리는 첫 아들 낳은 기쁨에, 어머니잃은


슬픔도 다소 가라앉힐 수 있었지.



첫 아들을 순산하고 첫 돌 지나, 다시 둘째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지.



그러던 중 회사에서 처음으로 합동결혼식을 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당신은 “그것 좋네. 어차피 우리는 하객이 그리 많지도


 않을것이니, 합동결혼식이면 누구 하객인지 모르니 더 좋네.


신청합시다.”



그런데 내가 가만 생각해보니 공교롭게 아기 낳을 시점이라


망설이게 되자,



당신은 아기 낳게되면 안하면 되고 신청부터 하면 되지요.”



그리하여 합동결혼식을 신청하였고, 고맙게도 우리 둘째 아이는


합동결혼식날 까지 당신 배 안에서 잘 지내고 있었지.



꿈에도 그리던 결혼식 날이 다가오자, 큰 숙모님이 오셔서


“아가야 너 산부인과에는 다녀왔나? 아기가 어떻게 있는지


검사해봐라.”



“괜찮아요. 첫 애도 잘 낳았는데 뭐 어떨라구요.”



“그래도 안 그렇다. 혼자 가기 뭐하면 나랑 같이 가보자.”



그렇게 하여 산부인과 진찰을 받으니 아뿔싸! 뱃 속 애기가


거꾸로 들어서 있다는 것 아닌가?


 




 



임신 초기라면 애기를 되돌릴 수 있지만, 산월이 가까워 이제


돌릴 수 없으니 부득이 배를 째고 낳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찌되었건 합동결혼식은 시작되었고 사내 첫 합동결혼식이라


여러 곳에서살림에 도움될 선물이 들어왔다.



신혼여행은 회사 버스로 경주 코오롱 호텔에 짐을 풀고,


관광을 하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으나 이내 해산기미를


느끼고 병원에 가야했지.



배를 째고 둘째 아이를 낳고 회복시기동안 내가 당신을 좀


닥달했지?



배를 찢어 아픈 고통속에 있는데, 그 고통은 모르고 방구 빨리


안 낀다구 내가 성질을 좀 냈제? 미안해.



우리 이때까지만 해도 가톨릭 종교에 무관심했었네.



그러던 중 둘째 숙모님이 우리처럼 외롭거나 가난한 사람들은


성당에 다니면 참 좋다고 적극 권유했었지.


 




 



전하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1989년이었나?



나보다 당신이 우리 첫 세례받은 날을 잘 알고 있더구만.



전하성당에서 예비자 교리를 받으면서 세례명을 지으라 하길래,


난 2월 3일생으로 블라시오로 정했지.



당신 세례명은 성 바오로 출판사에서 나온 책 ‘벨라뎃다’를


감명깊게 읽은 탓에 “벨라뎃다로 하는 게 어떻겠노?”


그리하여 당신은 벨라뎃다가 됐지.



이 세례명 때문에 당신의 마음고생이 심하게 될 줄 상상도


못했지.



어찌되었던 어떠한 계기로 (사실은 평화방송 노동조합이


언론자유를 위해 파업을 벌이던 중 사장 신부님이 공권력을


요청해 강제해산 시켰는데 이게 가톨릭 정신은 아니다.


싶은 마음에 냉담하게 됨.) 우리는 성당을



나가지 않고 7년 가량을 냉담하게 되었지.




심지어 레지오 단원이 냉담자 회두권면을 위해, 우리집을


방문하여 문을 두드리면 안에 있어도 없는 척 대꾸도 안했지.



그러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고 조장래 베드로 신부님께서


우리집 가정미사 오심에 고백성사후 다시 성당을 다니게 되었지.



 





 





7년간 주님을 등진 죄의 보속을 위한 탓인지, 벨라뎃다 당신은


정말 미친듯이 기도하고 다양한 성당 봉사활동을 했소.



기도를 등한시하는 나에게 질타도 많이 하던 당신!



남보다 목소리가 크지만 옳은것은 옳고 그른것은 아니라


당당히 말하는 당신이었어.



때때로 그렇게 직설을 하는 당신이 못마땅해 짜증을 부리거나,


당신을 질타까지 하기도 했지.



“당신이 남자답지 못하고 남들 앞에서 이중인격을 드러내니,


남들이 당신은 좋다하고 나는 나쁘다고 욕하는거 아니냐?”



그래서 남들이 “벨라뎃다는 별나다. 별나됐다 별나됐다” 하고


빈정거리거나 놀린다고 하소연 했지.



그 일로 인해 마음의 상처 또한 많이 받고 있음을 난들


왜 모르겠나?



당신이 꾸르실료 교육 이수하고 왔을 때 내가 쓴 편지 내용속에


그 내용 들어있는거 기억하나?



“성녀 벨라뎃다의 이름을 놀림의 도구로 쓰는 교우가 무슨 가톨릭


신자냐고 질타를 했던 적 있었어.



그로인해 무심코 내뱉은 말이었는데 그것이 벨라뎃다에게는


마음에 상처를 줬구나 하면서 탄식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네.


 






 



주님의 귀염둥이가 질시의 대상이었나?


 



내 사랑하는 벨라뎃다!



아침에 눈만 뜨면 “오늘 하루를 맞이하게 해 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그것을 시작으로 우리 방어진성당 본당을 거쳐가신 신부님


이름 일일이 거명하면서 영육간에 건강을 기도하는 당신이었어.



많은 교우들에게 밝게 인사하고 포옹하면서 웃음을


선사해주던 당신!



그런 당신을 질시의 눈으로 쳐다보는 일부 교우들 모습을


난 보았네.



미사를 마치고 나오거나, 차를 타고 가다가도 12시만 되면


“삼종기도 바칩시다. 삼종기도 바치고 십년 은사 받으세요.”



외치던 그 모습 다시 보고싶은데..........


아침부터 집을 나서면 밤중이 되어야 집에 들어오던 벨라뎃다!


 





 


꿈에 그리던 유럽 성지순례 그게 마지막 여행


벨라뎃다!


당신이 늘 가슴속에 품고있던 꿈이 있다면, 벨라뎃다 성녀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유럽 성지순례였지.


마침내 그 기회는 왔건만......


재속회 회원들로 이루어진 유럽 성지순례가 있다고 하면서


가도 될까?


그러나 돈도 돈이지만 당신은 2년여 전 교통사고 후유증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으니 그게 문제다.


그래서 유럽 성지순례를 포기했다고 하더니만....


그러나 재속회 회원들이 벨라뎃다가 안가면 어떡하나?


같이 가자고 설득을 하니 마음이 다시 흔들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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